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히 폰 만슈타인 (문단 편집) === 제1차 세계 대전과 그 이후 === 만슈타인은 [[제1차 세계 대전]] 기간 중 [[동부전선]]에서 종군하였다. [[폴란드]]에서 부상을 입고 회복 후 [[세르비아 침공]], [[베르됭 전투]], [[솜 전투]] 등 1차 대전의 굵직굵직한 전투들에 참여하며 경험을 쌓았다. 1915년 [[대위]]로 진급했다. 잠깐 후방에서 [[참모]] 노릇도 하다가 전방 부대의 참모직을 맡으며 여름 공세에 참여하다 종전을 맞았다. 대위 시절 [[1925년]]에 [[소련]]과의 [[라팔로 조약]]에 의거한 군사 협력으로 [[소련군]] 장교들과 교환 훈련을 가게 되는데 이때 소련에서 만슈타인과 교환 훈련을 간 인물이 다름 아닌 '''[[게오르기 주코프]]'''였다. 이후 [[1928년]] 드디어 [[소령]]으로 진급하고 [[1931년]], [[1933년]] [[중령]], [[대령]]으로 진급했다. [[나치당]]의 집권 후, [[1935년]] 7월 육군참모본부 제1과장에 임명되어 작전 부분의 책임자가 되었다. 만슈타인은 이곳에서 능력을 발휘해 서서히 두각을 나타냈다. [[1936년]] [[보병]] [[소장(계급)|소장]]으로 승진해 육군참모본부 제1참모차장이 되고 당시 육군참모총장 [[루트비히 베크]] 장군의 총애를 받으며 참모본부 내에서 승승장구하며 사실상 차기 [[육군참모총장]]으로 내정되었다. [[1938년]] [[중장]] 진급. 하지만 나치가 군부 장악 목적으로 일으킨 [[블롬베르크-프뤼치 사건|블롬베르크-프리치 사건]]이 일어남으로써 육군 [[상급대장]] [[베르너 폰 프리치]] 장군의 스캔들 사건의 여파로 베크 장군이 사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자 덤터기를 쓰고 제18보병[[사단장]]으로 좌천되었다. 좌천 직전에 히틀러의 [[오스트리아 연방국]] 침공 명령에 따라 베크와 함께 '''5시간 만에''' 오스트리아 침공 작전을 수립했다. 히틀러가 육군참모본부에 덜컥 내린 침공 기한에 맞춰 작전을 수립하려면 정말 5시간밖에 없었다.[* 이 시기 육군 최고사령부에서의 만슈타인의 역할을 알고 싶으면 <히틀러 최고사령부 1936~1945>를 참고.] 여담으로 베크가 물러난 후 본의 아니게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[[프란츠 할더]]를 만슈타인은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생각하며 원수 보듯 했으며, 할더 또한 그런 만슈타인을 곱게 보지 않았다. [[파일:external/img.welt.de/Adolf-Hitler-Politiker-NSDAP-D-Lagebesprechung-im-Hauptquartier-des-Heeresg.jpg]] ▲ 작전 회의 중인 만슈타인과 히틀러.[* 만슈타인과 히틀러 가운데에 있는 안경 쓴 장군은 만슈타인의 작전 참모였던 [[테오도어 부세]]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